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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leryshop·洗心址

겨울절간,바람도 숨죽이다

 

글=손민호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그러니까 어느 날 훌쩍 문득 떠나보는 것이다.

이 풍진 세상이 문득 버겁거든 내 살아온 흔적이 무연히 덧없거든, 무작정 길을 나서보는 것이다.

 행장은 가벼울수록 좋고, 헤진 신발이어도 상관 없다.

마실 나가는 것 모양 그렇게…, 허허로운 마음으로 사뿐히 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그렇게 내디딘 걸음은 절집을 향해야 마땅하다. 산속 깊이 들어앉은 외진 산사라면 좋고, 빛이 바래 되레 은은한 문 창살 단청이 있는 절집이면 더 좋다.

밤새 눈 내린 아침, 경북 문경 사불산 자락의 대승사를 찾아나선 까닭이다.

걸음을 떼기 전에 미리 공부를 했다. 절집에서 종종 묵곤 했지만 대승사는 초행 길이어서다.

역시 대승사는 사부 대중에 널리 알려진 절이 아니었다. 하나 종단에서는 달랐다. 선(禪)을 수행하는 거처로 대승사는 이름이 높았다.

이력도 깊다. 신라 진평왕 때인 587년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고, 신라 불교의 큰 이름 의상 대사와 원효 대사가 절과 연을 맺었다.

고려 불교의 큰 스승 나옹 선사가 대승사에서 출가했고, 근래엔 여기서 성철 스님이 눕지 않고 앉아서 3년을 수행했다.

그러니까 대승사는, 시쳇말로 공부하는 절이다. 되바라진 관광지로 전락한, 몇몇 이름 난 사찰과는 격이 다르다.

절집 찾는 이유 깨우쳐준 대승사

 

-그래, 어떤 인연으로 이 깊은 곳까지 드셨는가.

-역마살이 끼었는지 여기저기 싸돌아 다니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것 참, 중 팔자보다 좋은 팔자로구먼.

-속세가 워낙 소란스러 속세를 벗어난 곳을 대중에게 알리려 합니다.

-그렇다면 잘못 찾아왔네. 절 안에도 사람이 살고 절 밖에도 사람이 사는데, 어디가 속세이고 또 어디가 속세가 아니란 말이오.

-아이쿠,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럼 절 내력이라도 들려주십시오.

-우리 절은 공부하는 절이외다. 십 수년 전만 해도 고시생을 받았지. 지금은 그 방마다 스님들이 들어와서 공부하고 있고.

지금은 동안거 중인데 스님 십여 분이 수행 중이시네. 우리 절에서 공부해서 사법고시에 붙은 사람이 300명이 넘는다지 아마.

 아마도 우리 절에는 그런 기운이 있는 것 같소만.

-인적이 드물고 조용해서 그런가요.

-예선 하루에 두 시간 자면 충분해요. 백 일간 용맹정진하신 스님도 여럿 있었소. 물론 나도 했었고.

-용맹정진이라면 잠을 안 자고 수행하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100일씩이나….

-고생이라고 생각하면 고생인 것이고, 좋아서 하는 일이면 힘든지 모르는 것이고. 우리는 템플스테이를 해도 하루에 두 시간씩만 재웁니다.

그건 그렇고 차 맛이 괜찮소?

-맑습니다. 아침 샘물 모양 맑습니다.

-우리 절은 차 말고도 산삼이 좋습니다. 이 절에 처음 들어온 게 1995년인데, 그때 좋은 씨를 받아서 산 자락 곳곳에 뿌려놨지.

그게 지금은 제법 산삼 행색을 갖췄소. 저번 가을엔 심마니가 우르르 몰려왔으니까.

-내다 팔기만 해도 큰 돈이 되겠습니다.

-돈 벌려고 삼을 심었나?

-그럼 왜 심으셨습니까.

-좋은 건 그냥 보기만 해도 좋은 것 아니겠소. 삼도 마찬가지요. 우리 절에 들렸다 삼을 발견하면 기분이 좋을 것 아니오.

-마음이 못 된 사람만 횡재를 하겠군요.

-그래야 몇 포기 아니겠소. 사람은 덕 복이 있어야 합니다. 당장은 손해 보는 것 같아도 덕이 있으면 복이 되어 돌아옵니다.

젊은 기자 양반도 너무 조급하게 살지 마시오. 당장은 억울하고 분해도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시오.

-제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는가 보지요. 늘 쫓기고 치이고 찌들어 사는 꼴 말입니다.

“공부를 해야 세상에 없는 걸 보지요”

스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내 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느냐”고 스님은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던 스님이 불쑥 화두를 던졌다.

-없는 걸 그릴 줄 알아야 합니다.

-내게 안 보이는 것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당연한 것이고. 내 말은, 세상에 없는 것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오.

-세상에 없는 걸 어찌 볼 수 있습니까.

-공부를 해야지요. 공부를 하면 없는 걸 그릴 수 있습니다.

이미 밤이 깊었다. 하나 머리는 맑았다. 스님 말씀대로 수마(睡魔)를 쫓아내는 기운을 받은 모양이다. 대신 마음은 무거웠다.

눈 앞의 것도 분간 못하는 주제에게 없는 것까지 보라시니…, 스님이 던진 화두가 내겐 너무 무거웠다. 아니, 죽비마냥 따끔했다.

겨울, 산사의 밤은 적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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