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탄생 250주년 - 천명天命 다산의 하늘 "
강진에 가면 다산초당과 사의재 , 청자 전시관, 그리고 우리나라 미항이라는 마량항에서
1박을 한다면 이 어찌 즐겁지 아니 하겠는가?
또 사의재四宜齋에 들러 아욱과 기장밥에 동동주 한잔이면 이 어찌 감복이지 아니 하겠는가
것두 아들과 함께라면
강진에 가면 아욱과 기장밥에 동동주 한잔을 마셔야 하는 이유는
왜냐고 물으시면 저와 여행을 따라 나서지요 ...
토요일 오전 11시 집에서 나섰다.
도로는 피서 차량으로 꽉이다.서서히 그리고 여유롭게 운전을 하자.
조바심은 버리고 , 새벽에 런던올림픽 개막식을 보느라
새벽에 출발 하려던게 늦어졌다.
월출산 들녘이 눈부시다.
다산초당이 보인다 ,아들녀석 이제야 마음이 놓인 모양이다.
휴게소에 들러 아이스크림으로...
난 아들이 자고 있어 깨우지 못하고, 아들녀석은 6시에 보니 아빠가 주무시고 있어
운전 하시려면 충분한 수면을 해야 할것 같아 깨우지 않았다나...
아무튼 그 위로로 서로 위안 받으며 오후가 되서야 강진에 도착하였다.
월출산을 보니 또 오르고 싶은 마음이다.
강진 사의재 주막집이다
동양의 선비나 지사, 문인들은 자신이 머무르는 자리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세상에 내보이는 수단으로 현판을 걸었다.
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이 발달한 조선시대의 특징이다.
그들은 집이나 사람채 또는 휴식을 취하는 작은 정자에까지 자신이 직접쓰거나 권력가 또는 명필로부터 써받은
현판을 문위에 걸어두고 그 곳에 머무르는 뜻을 세상에 내보이고 또한 잊지 않으려했다.
사의재는 ?
다산 초당으로 오르는 길이다.
다산초당을 오르며 아들에게 물었다.
-아들~ 유배는 조정에서 반역죄로 사약을 받기전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유배를 떠나는 것인데
이런 경치 좋은 곳이라니 이상하지 않아 ?
- 아빠 올해가 탄생 250주년이라면 지금 주변에 있는 수목이 250년 넘어 보이는 것은 얼마 안보인다며
엉뚱한 대답이 돌아 온다. 지금 포즈 취하는 나무 말고는 ...
- "ㅎㅎㅎ .."
- 아빠 ! 그 당시에는 험한 곳이었는데 이후에 잘 가꾸어진 곳이 아닐까요 .
- 그럴수도 있겠지이 ... (어딘가 설명판이 있겠지 하며)설명을 하려다 참았다.
드뎌 초당에 도착 하였다.
석벽에 정씨의 돌이라고 정석이라 표시
연지석가산/ 다산이 만든 연못입니다.
꽃과 나무를 싶고 물을 끌어 폭포를 만듬
초당 오른쪽에는 동암(제자들이 수학하는 곳)이 있고
왼쪽에는 서암(제자들이 숙식하는곳)이 있습니다.
동암을 지나 천일각으로 가는 길입니다.이 길을 따라 가면 백련사로도 통합니다.
천일각에서는
강진만 바다와 바다건너 칠량과 천관산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천일각(天一閣)이라는 이름은
“하늘 끝, 한 모퉁이”란 뜻의 "천애일각天厓一閣"의 줄임말이랍니다.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사옥’에 연루돼 셋째 정약종(1760~1801)은 처형을 당하고,
약용은 강진으로, 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가라는 어명이 내려진 것이다.
열흘 넘게 걸려 전남 나주에 도착한 형제는 밤남정이라는 주막집에서 기약 없는 이별을 한다.
다산은 시 ‘밤남정 주막집의 이별’ 에서 이날의 심정을 이렇게 적었다. ‘
초가 주막 새벽 등불 푸르스름 꺼지려는데/
일어나 샛별 보니 이별할 일 참담해라/
두 눈만 말똥말똥 둘이 다 할 말 없어/
애써 목청 다듬으나 오열이 터지네.’
“부럽구나 저 기러기 … ”
다산은 이곳에서 흑산도로 유배를 간 형을 그리워하고
고향생각에 잠기기도 하였다고 한다.
하늘 참 맑습니다.
초당앞에 있는 바위는
다산이 차를 끓여 먹던 곳으로 다조라 합니다.
다산에 대한 공부를 마치고...
아들도 포즈를 ...
다산의 이야기....
초당에 들어서자 훈장님 한분 계신다.
- 저어~선생님!하며 물었다.
- 사의재에는 먼놈의 주모하고 항아리 동상을 해놧따요 ? 강진군은 돈이 많은값쏘이..
나는 오랫만에 고향 사투리로 물었다(아들녀석은 아부지 왠 사투리냐는 눈치다.ㅎ)
고향을 찾는건 이런 정겨움이 아닐까 잊었던 추억을 상기 시키는것...
한복을 입으신(분위기는 서당 훈장님) 어르신이 웃으시면서
-시간 이쏘오 ?
-째깐 있는디요 ...
-옆에 서 있는 학생은 아들이요?
-아 예 ~
-어디서 왔따요 ?하고 묻는다 .
-예~서울에서 오늘 출발 했습니다,
-아들이 겁나게 잘생겨 부렀쏘오 ~하시면서 착한가 봅니다.
-"..."
-요즘 고등학생이 아버지 손잡고 요런대 오기가 여간 힘들지라~...
초등학생은 부보님이 가자고 헝께
멋모르고 따라 나서고 하지라우...
-선생님?(나를 부를 호칭이 애매한 모양이라 그리 부른거 같다)
시간 이쓰먼 요기 좀 안으씨요 ..다산 정약용선생 설명 할라믄 긴께요 ...
-학생도 이왕 아부지 따라 나섰응께 여기 앉아서 듣쏘 ..요즘 보기드문 효자일쎄~~
요즘 애들은 각자 따로따로 노는디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며 ,기특하다며 연신 칭찬이다.
선비께서는 구수한 사투리로...
간단하게 요약해서 설명 해드릴테니 땀도 식힐겸 툇마루에 걸터
앉으라며 선풍기 앞에 자리를 내어준다.
부채가 어울릴 듯 한데 오신 손님들의 배려인 모양이다.
-그랑께 다산은 신유박해로 다시 말하믄 천주교탄압을 빙자한 남인세력에 대한 정치보복으로
정약전,정약용 형제는 고문끝에 유배 갔지라우...
세쨋형 정약종은 천주교도임을 부정하지 않고 ..사실을 불어 부렀제(이실직고)
이실직고 하믄 나두겄쏘오 조정에서 그 즉시 형은 참수 당해불고(당하고)
약전형은 흑산도로 약용은 강진으로 왔는디 ...처음 부터 여기 초당이 아니고
-강진 동문매반가라는 곳으로 처음 유배를 왔지요
지금 주소로는 강진읍 동성리 동문 밖으로 있던 주막으로
"동문매반가라"는 이름은 "동문에 있는 밥을 파는 곳"이라는 뜻인디 지금은 "사의재"란 주막집있어라우..
(어르신은 아따 머 부터 설명하까 ? 하시면서)
-시간이 어떠요? 하고 내게 묻는다
(아들녀석도 호기심이 있는 눈치라, 나는 얼른 "땀도 식힐겸 듣고 가지요" 했다)
선비께선
-듣기 싫은데 나혼자 떠벌이믄 주책없다 헝께 물어는 바야제 하신다.
그래야 실레가 안됭께 말이요...
-나도 그 질퍽한 사투리로 "아니요 갠찬은디라 ,시간도 있꾸마니라우" ..했다(시간이 있다)ㅎㅎ
- 다산이 여기 와서는 아주 오갈데도 없어서 주모 할머니의 배려로 강진의 동문 밖 주막집에 머무르는디
양반이 그 당신에 강진 여기도 오지라믄 오진디 이 시골에 견디것쏘?
제 아무리 다산이라 해도 유배 초기엔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술로 시름을 달랬지라우
이런 다산을 보다 못한 주모가 어느 날 다산에게 이런 말을 했지요.
"아무이 양반이어도 이제는 나라에 죄를 지은 사람인디 죄 값을 치르려면은
이렇게 술로 허송세월을 보낼게 아니라 제자라도 가르치시오" 하며 퉁명 스럽게 말을 했다고 합디다.
- 그러자 오갈 데 없는 자신을 거둬준 주모의 닦달에 다산은 마음을 고쳐먹고
지금까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상과 양반이라는 계급을 주막집 마당에 파 묻어불고
새로운 공부를 하자고 마음을 묵어 부럿제...
- 인자 거기서 말한 다산의 실학實學이 태어 난것이제 ..한 마디로 다산 실학의 학문적 태동은
주막집 앞마당 이지요. 조끔 이해 하것쏘 ?
- "..."
- 다산을 깨우친게 주모이지요 ..그래서 거기가(사의재) 주모 동상하고 ,주모가 술따른 동상이 있지요
내용을 모르면 강진군에는 먼놈의 주모 동상이 있다요 ? 하며 의아 한당께요..
- 인자 (이제) 거기서 제자들을 양성하는데 자신의 거처를 사의재四宜齋라고 하는데
당호인 사의四宜란 <마땅히 해야 할 네 가지>란 뜻이지요
네 가지는 [맑은 생각], [엄숙한 용모], [과묵한 말씨] 그리고 [신중한 행동]을 가리키는디
고난에 닥쳐서도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중심을 잃지 않으려 애썼던 학자의 자존심을 읽을 수 있고요
결국 다산이 강진에서의 유배생활을 극복하고 조선 최고의 사상가로 거듭나게 된 데엔
주모의 자극이 큰 도움이 됐던 것이고, 그곳이 그 주막집 사의재란 곳이오
지금은 웰빙식품으로 파는 곳으로 강진군에서 복원을 해 놨지요...
- 어째 선생님은 거기 들러서 동동주 한잔 하셨으까아? 하며 묻는다
- 아니요 제가 운전중이라서...
- 아~ 그라요 음주운전은 절대 안되지라우..하며 웃으신다.
- 그레도 강진에 오면 주막집 사의재에 들러서 아욱국과 기장밥에 동동주를 먹어야 하는디
째간 아쉽게 되부렀쏘이...
- 아따 그런말도 있지요 예날에는 아욱국은 사립문을 걸어 잠그고 먹는다는 말
그게 요즈음은 '웰빙국"이라지요
-다산이 후학을 양성하면서 어느날 제자 황상집에 갔는디 그 때가 마침 아침이라 제자 항상은
나물 밭의 이슬 젓은 아욱을 아침에 꺾고 국을 끓이고,
동쪽 골짜기의 누런 기장을 밤에 찧어 놓는 걸로 끼니를 대접 했다고 하는디
하나의 설은 청렴하다는 뜻이고,
또 하나는 그 당시 때거리가(식량)없어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사회상을 보여준게 아니냐 하는 설들이 있어요
-다산의 시구에 "집 앞 남새(나물)밭의 이슬 젓은 아욱을 아침에 꺾고 동쪽 골짜기의 누런 기장을 밤에 찧는다"는
구절은 다산의 제자 황상이 다산과 추사를 초대해 아침밥에 아욱국을 내놓은 일화라고도 해요
다산은 추사(김저희)하고도 가깝게 지냈다고 합디다.
- 근데 선생님 여기 초당은 경치가 좋은 곳인데 이 좋은 곳으로 어찌 오게 됬냐며 하고 아들이 묻는다
- 그래 그것이 다들 궁금하제...원래 여기는
차 밭이었제 . 차가 많은 곳 ,그래서 다산 茶山이고, 원래 산 이름은 만덕산이지
- 원래 이 집은 윤종진의 집으로 다산초당의 원래 주인이였던 윤규노의 넷 째 아들이
거처 했는디 어느날 다산이 여기 놀러와서 마음에 들어 하니 이 정자를 그냥 줘부렀제
...여기와서 후학을 양성하고 부터는 찾아온 선비도 많고, 다산이 명성이 자자했지..
중간에 일어 설 수 없어...눈치만 보는데 아들도 엉덩이를 들썩 거리고
나도 자꾸 시계을 보자 급 마무리를 하셨다.
- 아들이 착하니까 이 다음 커서 아부지 한번 모시고 이 곳에 놀러 오그라잉 ... 하신다
- 남도南道가 배울것도 많고 경치가 좋은 곳이다 . 아부지 고향도 여기랑께 꼭 오그라잉 ...
- 아들은 예~~대답하며 일어 섰다.
자리를 떠 우리는 구석진 곳을 구경하였다.
선비의 숨결이도 느끼려는 것일까?
다산에 대한 얘기를 설명해주신 어른은
나중에 알고 보니 (전시관에 들러서)다산초당의 원래주인인 윤단의 6대손인 윤동환씨란다
강진군 군수를 역임하셨다고...헉 어쩐지 구수한 사투리로 해박하시다 했다.
방의 굴뚝이다.
할머니게서도 여기를 찾으시다니
(tip :사려깊은 주막 할머니의“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얘기에 자신 스르로 편찬한 아학편을 주교재로 교육을 베풀고 경세유표와 애절양 등을 이곳에서 집필하였다.
다산은 주막 할머니와 그 외동딸의 보살핌을 받으며
다산초당으로 오기전 1801년 겨울부터 1805년 겨울까지 주막집에 보냈다고...
하산 길에 잠시 발을 멈추며
다산은 이곳에서 해장선사,초의선사,추사 김정희등과의 교류로 차를 즐겼다는데
각자의 개성도 이 길을 통하였으리라...
초당 기념관 ,다산초당,그리고 백련사로 이어지는 들레길이다.
다산의 실학정신과 차향이 코 끝을 향으로 남는 듯...
숲속에 그저 머무르고 싶었다.
다산은
성곽의 꽃' 수원성을 거중기를 이용해서 쌓도록 설계했으며
사도세자의 묘에 가기 이해 한강을 건널 때 배와 널빤지를 이용한 배다리를 만들었으며
영조대왕과는 10년 차의 나이지만 두 사람은 군신이면서 사제, 학문적 정치적 동지였다.
바로 이런게 실학정신이 아닐까...천명 ...다산이 꿈꾸던 하늘 말이다.
아들아
무엇을 알려고 하지마라 여행은 그저 그곳에 그런 선비의 정신이 있었구나 하면 되고
그리고 먼 훗날 그 길을 다시 따라 나설 때
아버지와의 동행을 기억해 내고 추억 한다면
아부지의 바램은 이루어 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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