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속에서 승자와 패자의 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는 이유다.
기원전 28세기 길가메시 대에 와서는 그 대립 관계가 절정에 이른다.
여기에서 엔키두는 우르크에 도전한 다른 부족의 지도자일 가능성이 높다.
후기 가야를 이끌었던 가라국(대가야) 유적인 고령 지산동 고분군.
우리의 고조선 신화도 마찬가지다.
아버지 환인을 졸라 인간세계에 내려온 환웅은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온 외부세력일 가능성이 높다.
인간이 되겠다고 찾아온 호랑이와 곰 또한 호랑이와 곰을 각각 토템으로 삼고 있던 토착 부족들일 것이다.
첨단 청동기를 소유한 환웅의 외부세력은 하늘을 숭상하는 문화적 배경을 볼 때 북방 유목민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들이 곰을 숭상하는 토착 부족과 손을 잡고 지역을 다스리게 된 것이다.
이제 가야로 돌아올 차례다.
“천지가 개벽한 뒤 이 지방에는 아직 나라 이름이 없고 군신의 칭호도 없었다.
(…) 9간(干)이 백성을 통솔했는데 모두 1만호 7만5000명이었다.
그때 사람들은 산과 들에 모여 살면서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서 먹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첫머리다. 9개의 씨족으로 구성된 사회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서 소리가 들린다.
“하늘이 내게 명하기를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 하셨다.
너희들은 산봉우리 정상 흙을 파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고 노래하며 춤을 추어라. 그러면 대왕을 맞이하게 되리라.”
9간이 신탁(信託)에 부응해 사람들을 이끌고 노래하고 춤을 추니
하늘에서 내려온 자주색 줄 끝에 붉은 보자기로 싼 금상자가 있었고
그 안에 ‘해처럼 둥근 황금알 여섯 개’가 있었다.
각각의 알에서 동자가 나와 여섯 가야국의 왕이 되었는데, 그중 가장 먼저 태어난 수로(首露)가 가락국의 수로왕이다.
우수한 철기문화를 소유한 김수로의 집단이 북쪽에서 내려와 김해 지역을 접수하고
청동기 단계에 머물러있던 9간 사회를 통합한 것이다.
후기 가야의 맹주인 가라국 신화는 다르다.
조선 성종 때 노사신 등이 펴낸 『동국여지승람』은 신라 문장가 최치원이 편찬했다는
『석이적정(釋利貞傳)』과 『석순응전(釋順應傳)』을 인용해 가라국 신화를 소개하고 있다.
“가야산신인 여신 정견모주는 천신 이비가에 감응해 대가야의 왕 뇌질주일과
금관국의 왕 뇌질청예 두 사람을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으로 별칭이라 하였으나
가락국 옛 기록의 여섯 알 전설과 더불어 허황한 것으로 믿을 수 없다.”
가락국과 가라국의 시조가 형제가 된 것이다.
광개토대왕의 남정으로 멸망한 가락국 지배세력의 일부가 고령 가라국으로 들어와 토착세력과 연대한 것일 터다. 가
라국 시조가 형이 된 것은 나라를 잃고 피난한 집단에 비해 토착 지배세력의 힘이 강했을 테니 당연한 일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알이 아니라 산신의 자식으로 바뀐 것은 외부에서 들어온 이주 세력이 아니라
이미 토착 지배세력이 된 지 오래된 상황이라는 사실도 말해주고 있다.
불교 팔정도(八正道)의 첫째인 정견(正見)이 신의 이름에 들어간 것처럼
불교적 윤색의 가미가 특히 그렇다.
가야 신화의 장소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구지봉은 접근로 공사 중으로 이 까칠한 방문객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석봉의 글씨라 전하는 구지봉 표석을 못 본 아쉬움은 남지만 신화적 상상력의 나래를 펼치는 데 부족할 건 없었다.
이훈범 중앙선데이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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