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 전쟁은 가진 자들의 사치다. 비용이 많이 드는 취미활동이다.
민초들이야 국가가 그저 마음 편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해주면 그만이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고대 국가들의 영토 전쟁 역시 마찬가지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 역시 그렇다.
고국원왕의 불운에는 배신도 한몫 거들었다.
369년 고국원왕은 친히 2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을 향했다.
백제는 태자인 근구수가 군대를 이끌고 나왔다.
양군은 오늘날 황해도 연백으로 추정되는 ‘치양(雉壤)’에서 대치했다
. 이때 고구려군에 원래 백제인으로 죄를 짓고 고구려에 도망 온 ‘사기’란 자가 있었다.
사면 받을 절호의 기회라 판단했을 그는 몰래 백제군을 찾아가 고구려군의 약점에 대해 고한다
. “고구려군의 수가 많기는 하나 대부분 오합지졸입니다.
붉은색 깃발을 든 부대만이 날래고 용감한 정예군이니 이들을 먼저 깨뜨리면 나머지는 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 고구려는 백제와의 첫 대결인 이 싸움에서 대패하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작은 배신 하나가 역사를 바꾸는 일은 허다하다.
그 유명한 테르모필레 전투가 딱 그렇다.
협곡을 막고 페르시아 대군에 맞서 선전하던 스파르타군 300명이 전멸한 것도
페르시아군에 우회로를 알려준 그리스인 배신자가 있었던 까닭이다.
임진왜란 때도 조선 어부 한 명이 군대가 걸어서 도강할 수 있는 임진강 여울목 위치를 알려준 것이
왜군의 빠른 진격을 가능케 했다.
뜬금없는 애정 타령이 전쟁에 끼어들기도 한다.
고구려 안장왕이 태자로 있을 때 상인 차림을 하고
백제 땅이었던 개백(皆佰·오늘날 행주)에 갔다가 절세미녀인 한주를 만났다.
주와 부부의 연을 맺고 태자는 “내가 돌아가 군사를 일으켜 이곳을 차지한 뒤 그대를 데려가리라”고 약속을 했다.
이후 왕위에 오른 그가 여러 번 백제를 쳤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때 고구려 장수 을밀이 안장왕의 동생 안학을 사모했다.
백제에 승리하면 누이를 주겠다는 왕의 약속을 받은 을밀은 온 힘을 다해 백제군을 물리쳤다.
고구려는 개백 땅을 얻고 왕은 한씨 미녀를 얻었으며 장수 을밀도 사랑하는 여인을 얻었다.
하지만 그 땅의 백성들은 얻은 게 하나도 없었다.
고구려가 차지하기 전 개백의 태수가 주에게 눈독을 들였다.
주는 옥중에서 노래를 지어 불렀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전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고 넋이라도 있건 없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흔히 정몽주 원작으로 알려지고 있는 단심가다.
백제 땅 한씨 미녀의 작품이 고려 말 정몽주에 의해 리바이벌되고,
그녀 이야기가 조선조에 와서 『춘향전』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원작자가 잘못 알려진 사례가 또 임진강에 있다.
바로 거북선이다.
흔히 이순신 작품으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의 것이다.
기록상 처음 보이는 건 『태종실록』이다.
태종 13년(1413)에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 귀선(龜船)과 왜선(倭船)으로
꾸민 배가 해전 연습을 하는 것을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2년 뒤에는 좌대언 탁신이 귀선을 만들어 대비하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다.
이훈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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