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측에 얇은 형체는 두륜산이다
고향 故鄕 전설
그 임란(1959년) 때는 강원 ,경기 ,경상도가 왜놈들의 약탈에 백성이 궁핍하였고 , 오직 전라도만이 왜구들의
침략을 버티고,왜놈을 몰아 내고 있었으니 이순신 장군께서는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라고 말씀하신것이다.
백의종군하신 이순신장군께서 경상도 통영 앞바다에서
왜군을 대파하시고 전라우수영 울둘목(지금의 진도)으로 항진 하실 때
완도를 지나가게 되었다.지나는 길목에 우리 마을에서 하룻밤을 숙영을 하게 되었는데
바다 한가운데 "여바위"라는 작은 바위섬이 있었다. 그 바위섬에서 활 시위를 당겨
달마산 바위를 뚫었는데 그 바위는 구멍이 나서 "화살바위"라 불리었단다. 그 시각에는
이순신장군을 살해하라는 명을 받은 일본자객. 5명의 닌자가 부산으로 들어와 이순신장군의 행로를 육로로 쫓고 있었다.
아군의 진영에서는 자객이 뒤 쫒는다는 사실은 이순신장군을 비롯하여 휘하장수 몇명만이 알고 있었다.
며칠전 순천만에서 숙영 할 때 1차 살해를 시도 하였으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 장군이었다.그러나 병사들의 사기와
전투에 지친 병사들의 피로를 풀어 주려고 장군께서는 완도의 외항을 경유하지 않고 완도와 달도사이의 내항을 경유하여
우리 마을에서 숙영을 하게되었는데 지략가다운 전술형태로 학이진법의 지형을 잘 이용하신 듯 하다.
완도와 달도(섬)사이도 밀물과 썰물때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곳으로 또 다른 왜놈과의 항전을 준비 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연륙교가 놓여져 완도도 섬이라는 이미지를 벗어 던졌으나 역시나 풍광은 옛 그대로이다
장군께서 서 있었던 여바위는 만조때도 좀처럼 넘지 않는다.그 바위가 넘는 날이면 우리 마을에서 제일 예쁜 처녀가 죽는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유두나 백중이면 일년중 최고로 만조가 되는 날인데 어릴적엔 그날이되면 처녀가 죽는가 하고 선창가에 나가서
그 바위섬을 무서움 반 ,설레임 반으로 지켜보고 ...혹 태풍이라도 불라치면 동네 어른들은 바위섬 위에
작은 돌단을 쌓아 높이를 키웠다.아마도 그 어른신들은 집안에 과년한 처녀를 둔 아버지였을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엔 그 바위가 무서웠으나 중학생이 되어 바다를 헤엄처
바위에 도착하여 바위 뒷쪽을 보니 깊이를 가늠하기 여려운 시퍼런 바닷물에 오금이 저려오고
그 옛날 옛날에는 전설처럼 처녀가 그곳에 죽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나서 다시 헤엄처 오지 못하고 배로 돌아 왔던 기억.
그 여바위 전설은 내가 사는 동안 그런 일은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어쩌면
바위가 잠기는 일이 없었으니 죽는 처녀도 없었을 것이고, 그 무시무시한 전설은 간혹 마음 한구석을 두들긴다.
그리고 내가 어른이 되어 고향을 갔더니 그 바위는 그대로였다. 친구들 얘기로는 바위는 잠긴적이 많으나
동네에는 죽을 처녀가 없다는 말에 전설은 우스개스러운 애기거리로 남아 있었다.
그래도 나 어릴적에는 300호가 넘는 마을이었는데 이제는 연로하신 어르신들만이 마을을 수호신처럼 지킨다.
아마도 어른신들 마음속에도 나처럼 그 전설을 그리워 할지도 모른다.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 그저 마을은 계절 따라 그대로인것을 ....
설이 다가오니 고향전설도 그냥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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