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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leryshop·洗心址

사의 찬미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苦海)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헝가리의 민족 작곡가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에 가사를 붙인 노래 ‘사(死)의 찬미"다

 

 

1927년 8월 4일 오전 4시, 부산행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는 쓰시마섬 앞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배 안을 순찰하던 급사가 허겁지겁 선장에게 달려와 일등객실 손님 두 명이 사라졌다고 보고했다.
배 안을 샅샅이 뒤지고 항로를 거슬러 가며 수색했지만 사라진 사람은 찾지 못했다.
객실 안에서 “미안하지만 짐을 집으로 보내 주시오”라는 글이 적힌 메모지만 나왔을 뿐이다.

실종된 두 사람은 극작가 김우진(당시 30세)과 배우 출신 소프라노 윤심덕(당시 30세)이었다.
조선 내 모든 신문은 두 사람의 선상 실종을 ‘조선 최초의 선상(船上) 정사(情死)’로 단정했다.
 유부남이긴 했지만 부잣집 아들에 배운 것도 많으며 인물도 빼어난 당대의 ‘엄친아’와 조선 최고의 소프라노였던
당대의 ‘스타’가 함께 죽을 특별한 이유를 찾지 못한 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윤심덕이 실종된 직후 그녀가 마지막으로 취입한 노래가 유성기에 실려 곳곳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노래가 "사의 찬미"다

 

당시 조선인들이 두 사람의 죽음에서 받은 연상(聯想)과 결합해 공전의 히트를 쳤다.
중혼(重婚)이 드물지 않던 시절임에도 두 사람이 정말 이뤄질 수 없는 관계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둘이 정말 그토록 사랑하는 사이였는지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의문은 오히려 엉뚱한 방향으로 향했다.
둘이 죽음을 가장하고 이탈리아로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였다는 소문은
1931년 11월 이탈리아 주재 일본영사관의 조사 결과가 도착할 때까지 수그러들지 않았다.

1920년대는 자살의 유혹이 거세던 시대였다. 일본 경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전후 공황’,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의 ‘진재(震災) 공황’ 등으로 불황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고등교육을 받고도 취직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널려 있었고, 낭만주의니 허무주의니 하는 사조도 횡행했다.
둘의 죽음에 대한 유별난 관심은 당대의 식민지 젊은이들이 자신의 절망을 투사(投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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