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뇌를 떨구는 곳, 해우소
흔히 마음을 내려놓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말만큼 쉽지는 않다. 절에 가면 조금 쉬워진다.
고즈넉한 산사의 처연한 풍경 소리를 듣고 있으면 잠시나마 근심을 놓게 된다.
사찰에서 가장 낮은 곳, 해우소(解憂所)에 가면 조금 더 여유가 있다.
재래식 뒷간에 쪼그려 앉아 용을 쓰는 시간,
스님들은 “찌꺼기를 비우지 말고 마음속 번뇌와 망상도 비우라”고 전한다.
글=김영주 기자
선암사 뒷간 복도. 살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눈부시다.
일주문을 향해 쪼그려 앉으면 창을 통해 선암사 경내가 내려다보인다
자연 친화적인 해우소 ‘송광사 불일암’
1 작은 불당처럼 보이는 송광사 불임암 해우소. 대숲에 둘러싸여 있어 운치 있다. 2 개심사 해우소 가는 길. 눈 쌓인 작은 건물이 해우소다. 3 삼나무 숲 속에 자리 잡은 다솔사 해우소. | |
절집의 해우소는 2층 구조다. 2층이 용변을 보는 화장실 칸, 1층은 변·낙엽·재가 섞여 거름이 되는 발효 칸이다. 불일암 해우소 1층에는 문이 있다. 문 옆으로 작은 수레가 있는데, 암자를 지키는 덕인 스님이 직접 거름을 치운다고 한다. 수레 옆으로 낙엽이 가득 담긴 마대자루와, 낙엽을 태워 재를 만드는 아궁이가 보인다. 해우소 거름은 경내 텃밭 두엄으로 옮겨진다. 두엄 옆 몇 두렁 안 되는 채전(菜田)에는 한겨울인데도 싱싱한 보랏빛 갓 잎이 올라와 있다. 자연에서 인간으로 다시 인간에서 자연으로, 해우소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는 순환의 장이다. 동안거 중인 덕인 스님은 만나지 못했다. 행여 암자에 들르길 원하는 방문객은 묵언하기를, 송광사 담당자는 거듭 당부했다.
●가는 길 호남고속도로 주암·송광사 IC로 나와 송광사 방면 27번 국도 타고 10분. 061-755-5308.
민간의 측간 그대로‘개심사 해우소’
충남 서산 개심사 해우소는 서울 근방에서 찾아보기 힘든 재래식 화장실다. 규모 또한 대찰의 해우소에 비하면 소소한 편이다. 용변을 보는 칸은 성인 한 명이 쪼그려 앉기에 비좁을 정도다. 새마을운동 전 민가의 측간 그대로다. 동덕 주지 스님은 “서울 근방에서 이렇게 오래된 측간은 보기 힘들 것”이라며 “측간을 보기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일부러 찾는 이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낡아 주지 스님은 해우소를 새로 지을 생각이다. 물론 지금의 해우소는 그대로 남겨두기로 했다. 불편하고 냄새 나지만 “그 자체로 문화재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지대에 있어 물이 부족한 사정도 고려됐다. 주지 스님은 “수세식 화장실은 낭비에 가깝다”고 말했다. 그래서 돈이 더 들더라도 자연친화적이고 교육적인 재래식 측간을 만들기로 했다. 기와를 얹고 흙을 덮은 전통 한옥 방식의 해우소는 새로 짓는 데 2억 가까이 든다고 한다.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서산 IC로 나와 해미읍 방면 647번 지방도를 타고 15분. 041-688-2256.
지친 심신의 안식처‘다솔사 해우소’
가람의 해우소는 대웅전이나 괘불 탱화 못지않은 내력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큰 불당이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을 해우소 터는 그 절의 태초라 할 수 있다. 경남 사천 다솔사는 군부 독재, 일제 강점기 등 근·현대사의 수난을 고스란히 받아 안은 사찰이다. 36년 전 이 절에 들었다는 봉정(63) 법사는 다솔사 해우소에 얽힌 에피소드 한 토막을 들려준다. “유신 조치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이 절에 묵으러 왔지요. 그때만 해도 해우소에 죽분이 있었어요. 재래식 화장실에 대나무를 오랫동안 꽂아놓으면 대나무 통에 물이 고이는데, 죽분수라고 하지요. 매 맞고 생긴 장독(杖毒)에는 특효약이라 나도 그걸 먹고 나았어요. 아마 수백 년 동안 이곳에 꽂혀 있었을 겁니다.”
다솔사는 만해 한용운이 만당을 이끌며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했던 곳이며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승병기지로 삼았던 유적지이다. 다솔사 주지 혜운 스님은 “많을 다(多)자에 거느릴 솔(率)자를 쓰는 다솔사는 그 이름처럼 신라 때부터 수많은 인걸이 거쳐갔던 것”이라며 “해우소는 이들에게 자궁 같은 안식을 제공했을 것”이라고 남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남녀 4칸씩 마련된 해우소는 치렁치렁한 삼나무 가지 아래 포근히 안겨 있다. 쪼그리고 앉아 있으면 옛사람의 숨결이 들리는 듯하다.
●가는 길 남해고속도로 곤양 IC로 나와 58번 국도를 타고 곤양면사무소 방향으로 15분. 055-853-0283.
유서 깊은 뒷간 ‘선암사 해우소’
오래된 해우소로는 전남 순천 선암사 뒷간을 빼놓을 수 없다. 숱한 전란에도 불타지 않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전라남도 문화재로 지정된 이 해우소는 정면 6칸 측면 4칸으로, 절집 중에서 가장 크다. 해우소 정면에 걸린 ‘뒷간’이라는 현판이 오히려 당당해 보일 정도다. 비탈길의 높낮이를 이용해 상층과 하층을 분리한 점이 돋보인다. 용변을 보는 칸은 천장이 없고, 칸막이 역시 사람 가슴 높이까지 올라와 있는 점도 특이하다. 바지를 추스르려 일어서면 맞은편 여자 화장실이 훤히 보일 정도다. 포교사 전각 스님은 “번뇌를 벗어놓고 근심을 풀어 놓는 자리에 가릴 것이 뭐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선암사 해우소는 오래된 뒷간이면서도 현재까지 애용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수세식 화장실이 따로 있지만 가람 내 큰길 옆에 자리 잡고 있어서 스님들은 물론 방문객들도 이 오래된 뒷간을 마다하지 않는다. 전각 스님은 “선암사 스님 53명이 모두 이용하고 있어 (용변) 양이 많다”며 “예전에는 스님들이 직접 변을 퍼냈지만 요즘에는 포크레인이 와서 퍼낸다”고 말했다. 선암사 뒷간은 근래 지어지고 있는 절집 해우소의 모델이 되고 있다고 한다.
●가는 길 호남고속도로 승주 IC로 나와 선암사 방면 857번 지방도를 타고 15분. 061-754-5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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