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리
인도의 수학자 브라마굽타는 서기 600년경 ‘숫자 0’을 ‘슈냐(shunya)’라고 불렀다.
슈냐는 산스크리트어로 ‘공백(空白)’이면서 ‘부재(不在)’의 의미다.
공백이란 개념을 수용할 수 있는 철학적 기초를 바탕으로 0을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하는 ‘숫자’로 사용한 것이다.
그 이전엔 0은 그 자체가 하나의 숫자로 여겨진 게 아니라 그저 ‘빈 자리’를 표시하는 부호였을 뿐이다.
수(數)의 세상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빈 자리’는 인간사(人間事)에서도 물리적인 빈 공간을 넘어 ‘삶의 의미’요, ‘자연의 법칙’이기도 하다.
우선 동서를 막론하고 신화(神話)에서 세상의 시작은 빈 자리다. 맨 처음엔 하늘도 땅도 물도 없고 빛도 어둠도 시간도 없었단다.
바닥도 천장도 없는 텅 빈 공간, 빈 자리였을 뿐이라는 거다.
하기야 137억 년 전의 빅뱅(big bang) 이전에는 우주가 크기 0의 점과 같은 상태였다고 하니 신화의 황당함만 나무랄 일도 아닐 듯싶다.
인간의 참모습과 마음을 추구하는 종교의 영역에서도 빈 자리는 핵심 화두(話頭)다.
불교에서 마음은 실체가 있는 게 아니라 허공처럼 텅 비어 있다.
동서남북 어디나 텅 빈 자리가 아닌 데가 없다. 우주 속 무한히 넓은 빈 자리가 바로 불교에서의 공(空)이다.
그러니 깨달은 각자(覺者)의 눈에 일체 삼라만상(森羅萬象)은 텅 빈 자리에 존재할 뿐이다.
빈 자리는 무엇을 모르는지를 깨치게 하는 자연의 법칙 같은 것이기도 하다.
『생각의 탄생』을 쓴 로버트 루트번스타인은 조각맞추기 퍼즐을 예로 든다.
완성된 그림 못지않게 빠진 조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빈 자리 역시 중요하다는 거다.
그건 우리 자신이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하게 하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무얼 모르고 있는지를 알게 되면 빈 자리에 들어맞는 조각을 찾아낼 수 있음은 물론이다. / 김남중 논설위원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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