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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여다 본 것

애-플 2010. 10. 23. 10:53


이뭐꼬 (是甚磨)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이것은 무엇인가 ?
不是心 不是物 不是佛 이니  是什磨 오

이것은 유명한 화두입니다.
是其磨가 아니고 시심마(是甚磨)입니다.

是는 이것이란 말이고,
甚은 무엇이란 뜻이고,
?는 의문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래서 시심마는 “이것이 무엇인가?” 의미이고,
줄여서 소위 “이뭐꼬?” 라는 유명한 화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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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눈인가?
마음인가?
우리의 불성인가?

이뭐꼬?.....
불교에서는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선을 참구 하는데
의제로 하는 것을 화두라 하고 화두(話頭)는 천 칠백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중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 시심마(是甚磨)라는 것이 있으며,
이 뜻은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에 나의 '참' 모습은 무엇인가 라는 의제를 의심(疑心)하기 위하여"이뭣고"
하며 골똘히 참구하면 본래면목 즉 참나를 깨다어 생사를 해탈하게 된다.

 


1.(是甚磨): “부모에게 받기 전 이 몸은 어디에서 왔으며 지금 이 몸을 끌고 다니는 건 누구인가?”
       

- 합 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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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공法空]

'모든 법인 만유(萬有)는 모두 인연(因緣)이 모여 생기는 가짜 존재(存在)로서 실체(實體)가 없음'이라는 말 
 
불교 교리를 공부하다 보면 '我空'과 '法空'이란 두 개념을 만나게 되는데
이 두 개념은 불교 교단내에서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 되는 개념입니다.
我空이란 '내가 없다'라는 뜻입니다. 인도의 전통 브라만교에서는 영원불변한 우주의 실체인 'Brahman(梵)'과 함께
개개인의 실체로서는 'Atman(我)'이라는 것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그런 영원불변한 실체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삼법인에서 말하는 '諸法無我'라는 명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집착하는 '진리'라는 것은 정말 영원불변하는 것일까요?
정말 진리라는 것이 있어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일까요?
당연히 교단내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논쟁이 분분해 집니다.
그래서 설일체유부같은 부파교단에서는 '我空法有'론을 폅니다.
즉 '나'라고 하는 영원한 실체는 없지만'진리'는 있다라는 의미겠지요.
하지만 대승불교 시대로 접어들면서 '나' 뿐만이 아니라 그 영원불변하다라고 믿는'法'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바로 '法空'입니다.
이것이 금강경이나 대승경전 곧곧에서 만나게 되는 공사상입니다.

법명을 '法空心'이라고 한 것은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살라는 뜻이겠지요.

우리가 숭고하다고 믿고 받드는 그 '진리'마저 공하다고 하는데 달리 무엇에 또 집착하겠습니까?
하지만 이같은 구구한 해석보다 제가 가장 하고 싶은 그 불명에 대한 해답은 이름은 그저 이름일 뿐이라는 겁니다.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뜻에서 지어준 이름인데  이름에 담긴 개념이나 뜻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집착이 아닐가 싶네요.

 

구업 그만 짓고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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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삼매 (힌두교·불교) [samadhi, 사마디]

 

힌두교와 불교의 종교 및 철학에서,
인간이 육체에 얽매어 있는 동안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정신집중 상태.
이렇게 정신을 완전히 집중하면 최고의 실재와 하나가 될 수 있다.

삼매는 절대자에 완전히 몰두하여 깊은 명상에 잠긴 상태로서,
욕망과 분노를 비롯하여 자아가 낳는 어떠한 생각이나 감정도 마음의 평온을 깨뜨리지 않는 상태이다.
삼매는 정신적 기민함과 날카로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느끼는,
기쁨으로 가득 찬 평온한 상태,더 나아가 환희와 아름다움의 상태이다.
힌두교와 불교에서는 삼매를 모든 정신활동과 지적 활동의 절정으로 간주한다.
 
삼매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의 죽음은 역시 삼매로 간주된다.
삼매의 의미는 더욱 확대되어,
오늘날에는 그런 능력을 갖고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죽어서 화장된 장소도 삼매라고 불린다.

그래서 모한다스 간디가 화장된 델리의 화장터는
'간디의 삼매'라는 공식 명칭을 갖고 있다.

삼매(三昧)에는 일심(一心)삼매와 무심(無心)삼매가 있다.

일심 삼매란 생각이, 번뇌가 “사라지는” 상태이다
무심(無心)삼매란 생각이 "사라진"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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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공我空

 

‘나’라고 하는 것은 오온(五蘊)이 화합하여 이루어진 것일 뿐,
 참으로 ‘나’라고 할 만한 실체는 없음.

아공관[我空觀]  / 아공의 진리를 바로 보는 견해.

[아공我空과 법공法空]

초기불교에서 존재의 연기적 실상을 보여주는 범주는 바로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이다.
어떤 것은 늘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상호 관계 속에서 일어나므로
그것에 실로 그렇다 할 것이 없다[我空].

이 때 어떤 것을 연기시키는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각 법들도 고정된 요소가 아니라
서로 의지해서 있는 것이므로 그것 자체도 공하다[法空].

이렇게 보면 오온이라는 단어 속에서 붓다는 이미 아공과 법공을 다 밝히고 있는 것이다.

색_수_상_행_식(色_受_想_行_識 )에서 색법은 인간의 활동 속에 떠오르는 어떤 것
곧 명사화될 수 있는 존재의 영역들이다.
산, 꽃, 물 등 자연 세계와 사회 역사의 여러 관계가 색법이라면,
수_상_행_식은 그것을 능동적으로 주체화하는 인간활동이다.
그런데 인간활동과 인간활동의 토대이자 활동 자체로 떠오르는 저 세계는 서로 맞물러 있다.
오온설에 의하면 색법은 인간활동 밖에 저 홀로 있는 외적인 세계가 아니라
활동 자체로 드러나는 인간적인 세계이며, 인간의 활동은 또한 색법으로 표시된 객관세계를 매개해서
일어나므로 객관적 활동이라 할 것이다.
색_수_상_행_식 오온은 이처럼 서로 의지해서 있으므로 있음 안에 이미 자기 부정의 계기가 있고,
있되 실로 있지 않으므로 자기 부정을 통해 새로운 자기 전개를 할 수 있다.
천태의 표현대로 하면 인연으로 있으므로
모든 법은 곧 공하고[卽空] 가유이고[卽假] 중도인 것[卽中]이다.

장미꽃을 예로 들어 보자.

장미꽃은 씨앗과 땅과 물과 바람과 햇빛, 장미꽃을 땅에 심은 사람의 노동 등이 겹쳐져서 지금 장미꽃으로 피어 있다.
곧 '장미꽃은 스스로 장미꽃이 아니다'라고 보는 것은 아공我空을 본 것이다.
그러나 아공만을 보아서는 장미꽃의 진정한 주체를 볼 수 없다.
장미꽃을 이루는 여러 계기마저 공한 줄 알아
 '장미꽃은 장미꽃이 아니지만 장미꽃 아닌 것도 아니다'라고 진술할 수 있어야 법공法空을 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장미꽃의 자발성과 능동성이 살아난다.
어떤 존재의 자기 동일성을 구성하는 여러 계기들을 법 곧 다르마(dharma)라 한다.

장미꽃의 경우 장미꽃의 자기 동일성을 구성하는 여러 계기들 곧 땅과 물, 따뜻한 햇빛과 바람[地_水_火_風],
씨앗과 사람의 노동, 땅을 판 삽과 괭이 등이 장미꽃을 장미꽃이게 한 다르마이다.

그런데 만약 장미꽃을 그것을 이루어주는 법으로 환원해 버리면
장미꽃 자체의 자발성과 능동성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오히려 장미꽃이 피어남으로 해서 장미꽃의 외적 조건인 지_수_화_풍(地_水_火_風)도
장미꽃의 지_수_화_풍으로 규정된다.
다르마가 아트만을 규정할 뿐 아니라 아트만이 다르마를 규정하는 것이다.
다르마가 아트만을 규정하므로 아트만이 공하지만, 아트만이 다르마를 규정하므로 다르마도 공하며,
아트만을 규정하는 다르마이므로 다르마가 창조적인 계기로 살아나고,
다르마를 규정하는 아트만이므로 아트만은 다시 자주성을 지닌 어떤 것으로 살아난다.

붓다의 연기론은 이처럼 아我와 법法을 동시에 부정하여 아我와 법法을 동시에 살려낸다.
아我와 법法의 범주를 사회과학적인 개념에 대입해 보자.

봉건제 사회 자본주의 사회라는 사회구성체를 여러 가지 계기에 의해서 규정된 어떤 것 곧 아我라 한다면,
한 사회구성체를 규정해내는 생산관계와 생산력 수준 그리고 한 사회의 물적 기반과 상부구조는
제법諸法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제법諸法이 한 사회구성체를 규정한다.
그러나 한 사회구성체의 자기 동일성이 유지되는 한 그 사회구성체의 생산관계와 상부구조와 토대의 관계는
그 사회구성체의 기본틀에 의해 규정된다.

이렇게 보면 한 사회구성체와 그것을 규정하는 인적이고 물적인 여러 관계는 변화될 수 없는 그 무엇도 아니고
신비화될 어떤 것도 아니며, 인간주체의 노동에 의해 변화될 수 있고 지양될 수 있고 극복될 수 있는 어떤 것이라 할 수 있다.

붓다의 오온, 십이처, 십팔계설은 그 기본 범주 자체가 아공과 법공을 동시에 보여주며,
 있음과 없음을 역동적으로 통일하는 중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치우친 수행자들은 오온이라는 말을 듣고서는 아공반야我空般若에는 들어가지만
오온 자체의 새로운 실체화에 떨어지며,
공하다는 말을 들으면 그 공을 '있음의 공함'으로 보지 못하고 '아무 것도 없는 허무'와 같이 보려 한다.

그래서 <반야심경>은 '색 등 오온이 공하다'고 하여 법도 공함을 보이고,
공을 허무와 같은 것으로 보므로 '공이 곧 오온이다'라고 말하여 공이 '있음의 공함'이므로
'공하기 때문에 새로운 있음의 생성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출처 : '반야심경'(현수법장 소, 학담 의기, 큰수레, 2003년 개정판), p161~163>

***** 만공스님의 가르침

 

1.나라고 하는 것은 “아무개야!”하고 부르면 “네!”하고 대답하는 바로 그것인데

   그것은 생사도 없고, 불에 타거나 물에 젖거나 칼에 상하는 것이 아니어서   일체 얽매임을 떠난 독립적인 나이다.

 
 2.누구든지 육신(肉身), 업신(業身), 법신(法身) 세 몸을 지녔는데,

    세 몸이 일체가 되어 하나로 쓰는 때라야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니라.

  : 법신만 중요 한 것이 아니라 생사를 따르는 이 몸도 중요 한 것입니다.

 


3.일체 행동은 법신이 하는 것이나, 육신과 업신을 떠난 법신이 아닌 까닭에   현상(現像) 그대로가 곧 생사 없는 자리이니라.

  : 이 몸 그대로 성불하고 이 세상에서 극락세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4.생사 없는 그 자리는 유정물(有情物)이나 무정물(無情物)이 다 지녔기 때문에

  한 가닥 풀의 정(精)이라도 전우주의 무장(武裝)으로 해체(解體)시킬 수 없나니라.

  : 내 마음이 전심전력을 다하여 허공에서 피워낸 한 송이의 꽃 !


 

5.나는 무한 극수적(無限極數的) 수명(壽命)을 가진 것으로,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금강불괴신(金剛不壞身)이라

   이 육체의 생사는 나의 옷을 바꾸어 입는 것일 뿐 인간이라면 자신이 소유한 생사의 옷쯤은

   자유자재로 벗고 입을 줄 알아야 되나니라.

: 진정 죽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먼저 죽겠다던 백봉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6.선방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상주(常住)하는 것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動靜)에 간단(間斷)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7.이(理)와 사(事)는 같은 원(圓)이라, 어느 각도에서 출발하든지 쉬지 않고 걸어가면

  그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기는 하지만, 나를 발견(自覺)하기까지는 선지식의 가르침이 없이는 될 수 없나니라.

 

8.선지식을 믿는 그 정도에 따라 자신의 공부가 성취 되나니라.

: 숭산 스님의 한 제자가 스님과 지낼수록 스님이 진짜 스승인가 의심스러웠다는 글이 생각납니다.

 


9.장맛이 짠 줄을 아는 사람은 다 공부할 수 있나니라.

 

10.공부하는 사람이 제일 주의해야 할 것은 먼저 나를 가르쳐 줄 선지식을 택해하여야 하고,

    나를 완성한 후에 남을 지도할 생각을 해야 하나니라.

11.일체 중생은 날 때부터 이성(異性)의 감응(感應)으로 말미암아 세세생생에 익히는 것이 음양법(陰陽法)이니,

    정신 모으는 데는 이성적(異性的) 장애가 제일 힘이 센 것이니, 공부하는 사람은 이성을 가장 멀리 해야 하나니라.

 

12.나를 완성시키는 데는 3대 조건이 구비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도량(道場), 도사(道師), 도반(道伴)이니라.

 


13.내가 처음 들던 화두는‘만법(萬法)이 귀일(歸一) 이라 하니 일(一)은 어디로 돌아갔는고?’ 를 의심하였는데,

    이 화두는 이중적 의심이라, 처음 배우는 사람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다고 하니, 하나는 무엇인고? 하는

    화두를 들게 하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하나는 무엇인고? 의심하여 가되 의심한다는 생각까지 끊어진 적적(寂寂)하고 성성(惺惺)한 무념처에 들어가야

   나를 볼 수 있게 되나니라.

 

14.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일체가 생기고, 한 생각이 멸할 때 일체가 멸하나니라.

    내 한 생각의 기멸(起滅)이 곧 우주의 건괴(建壞)요, 인생의 생사니라.

   : 고요한 새벽에 “내가 밥을 먹으면 우주 전체가 밥을 먹는다.”라는 생각에 웃음 짓던 것이 생각납니다.

 


15.꿈속에서 공부해 가는 것을 증험(證驗)하여 선생으로 삼을 것이니라.

 


16.꿈도 없고 생시(生時)도 없이 잠이 푹 들었을 때에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를 어디에 두는지 알아야 하나니라.

  : 역시 선사들은 공통적으로 다루는 명제 입니다. 

 


17.산몸이 불에 탈 때에도 정상적 정신을 가질 수 있겠냐?

   헤아려서 미치지 못한다면 사선(死線)을 넘을 때 자기 전로(前路)가 막막하게 될 것을 알아야 하나니라.

 


18.공부하는 데는 망상보다도 수마(睡魔)가 두려운 것이니,  수마를 먼저 조복(調伏)시켜야 하나니라.

 


19.공부에 득력(得力)을 못하였을 때 안광낙지(眼光落地)하게 되면 인업(人業)만 남아 짐승도 미남 · 미녀로 보여서

    그 뱃속에 들기 쉬우니라.

 

20.변소에 앉아있는 동안처럼 자유롭고 한가한 시간이 없나니, 그 때만이라도 일념에 든다면 견성(見性)할 수 있나니라.

 

21.설사 도인이 온갖 신통(神通) · 변화(變化)를 부리고, 죽을 때에도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이적(異蹟)을 보일지라도 이는 상법(相法)이니, 이런 상법이란 하나도 가히 취할 바는  아니니라.

 


22.정신은 물질의 창조자이지만,   물질이 아니면 정신의 존재와 효과가 나타나지 못하나니라.

  : 상대성이 없으면 절대성의 살림살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백봉 선생님의 말씀.

 


23.우리가 사는 세계를 중심으로 하여 위로 상상할 수 없는 최고 문화세계가 헤아릴 수 없이 벌어져 있고,

     아래로 저열극악(低劣極惡)한 그 양과 수를 헤일 수 없는 지옥의 세계가 다 함께 몽환세계(夢幻世界)인 것이니,

     과연 어떤 것이 실세계(實世界)인지?

    그것을 알아 얻는 것이 곧 진아세계(眞我世界)를 체달(體達)하게 되는 것이다.

 

24.이 우주에는 무한극수적(無限極數的 이류중생(異類衆生)이 꽉 차서 각각 자기습성에 맞는 생활권을 건립하고 있지만,

     우리 육식(六識)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로 점점 고정화하여 우리 사바세계 인간으로는 어느 한도를 넘어서는

     도저히 볼 수 없고, 느낄 수도 없나니, 천인(天人)이니 지옥이니 신(神)이니 귀(鬼)니 하는 것도 결국

     우리 육식으로는 판단할 수도 없는 이류 중생의 명상(名相)이니라.

 

25.천당은 갈 곳이요 지옥은 못 갈 곳이라면 우주가 내 한 몸이요, 천당과 지옥이 내 한집인데,

    중생은 한 세계를 두 세계로 갈라놓고 한 몸을 분신(分身)시켜 천당 · 지옥으로 나누어 보내는데,

    이것은 중생의 업연으로 됨이니라

  : 허공이 하나이니 진리가 하나이고 생명이 하나입니다. 일체의 근본은 하나입니다.

 


26.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은 무지(無知)를 면치 못하고, 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은 어리석음을 면치 못하나니라.

 


27.중생들은 알 줄만 알고, 모를 줄은 모르느니라.

  :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니라서, 자재하게 아는 것도 쓰고 모르는 것도 씁니다.

 


28.알지 못함을 알면 철저히 아는 것이니,

   정말 아는 법은, 알지 못할 줄을 능히 알 때에 비로소 진아에 체달 되느니라

 


29.일체의 것이 그대로 불법인지라 불법이라고 따로 내세울 때에  벌써 잃어버리는 말이니라.

  


30.물질(物質)은 쓰는 것이요, 정신(精神)은 바탕인데,  물질과 정신의 一單化를 불법이라 하나니라.

  : 절대성과 상대성.

 


31.입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요, 손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니,

    말하고 일하는 그 정체(正體)를 알아야 참된 말과 일을 하는 정작 인간(人間)이 되나니라.

  : 하하, 허공이 웃습니다.

 


32.불법을 부인(否認)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요,

    불법을 배척(排斥)하는 것이니, 이는 곧 자기가 부처이기 때문이니라.

 

33.소리 소리가 다 법문(法門)이요,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부처님의 진신(眞身)이건만,

   불법 만나기는 백천만겁(百千萬劫)에 어렵다 하니, 그 무슨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도리인지 좀 알아 볼 일이니라.

 

34.불교의 유심(唯心)이란 유물(唯物)과 상대가 되는 유심이 아니요,

   물심(物心)이 둘이 아닌 절대적인 유심임을 말하는 것이니라.

  : 허공도 허공을 떠난 허공임을 알아야 합니다.

35.허공〔虛空: 自我. 自性〕은 마음을 낳고,

   마음은 인격〔人格: 代表的인 人格者를 佛이라 함〕을 낳고,

   인격은 행동〔現實〕을 낳느니라.

 

36.불교는 전인류의 자아(自我)를 완성시키는 교육 기관이니, 다종(多宗). 각법(各法)의

   종교가 다 진아 완성의 가교(架橋)요 과정이니라.

 

 

37.불교에서는 신(神)을 초월하여 법신(法身)이 있고, 영혼 위에 진인(眞人)이 있음을 알아,

   그것을 증득하는 것으로 구경(究竟)을 삼는데, 육신(肉身)과 신과 영혼의 근본이 법신이요,

   그 근본을 잃어버린 육신과 신과 영혼이 서로 교환이동(交換移動))하는 생활이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인간이니라.

  : 에고가 있으면 영혼이고 에고가 없으면 법신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도 내 마음대로 내가 못하는데 죽으면 더욱 못합니다.


 

38.세상에서는 혈통(血統)으로 대(代)를 이어 가지만, 중은 자기를 깨달은 정신,

   곧 도(道)로 대를 이어 가는데, 세상에서도 조상의 향화(香火)를 끊게 되면,

   그에서 더 큰 죄가 없다는데, 불자(佛子)가 되어 중으로 부처님 법을 자기 대에 와서  끊는다면 그 죄를 어디에 비할 것인가?

 

39.이 우주 전체가 곧 나인 것을 깨달아 체달(體達)된 인간을 중이라 하나니라.

  : 우주란 허공을 말함이니, 허공을 아는 자는 바로 우주가 자신인 것을 아는 자 입니다.

 


40.세속 일은 잠시라도 쉼이 있지만, 중은 정진하는 일을 꿈에라도 방심(放心)할 수 없나니,

   털끝만한 틈이 벌어져도 온갖 마장(魔障)이 다 생기느니라

 


41.중은 당파(黨派)를 짓지 않아야 하나니,  우리라는 구분이 있다면 벌써 중의 정신을 잃은 소리니라.

 


42.중은 먼저 시비심(是非心)을  끊고 지내되, 남이 나를 시비할 때를 당하여 나의 잘못이 있다면

   잘못을 반성하여 고치고, 만일 나의 허물이 없을 때는 나의 일이 아니니  상관치 말라.

   이와 같이 대중에 처하면 불안한 시비가 없고, 항상 편안하리라.

 

43.마음은 무한대(無限大)한 것이니,  마음의 사자(使者)인 몸의 능력도 제한되지 않은 것이니라.

  : 나의 몸은 모든 부처님의 위의와 슬기와 솜씨와 자비를 실행하는 대행기관입니다.

 


44.죄의 원천(源泉)은 노는(방일. 해태) 것 이니라

 


45.지옥이 무서운 곳이 아니라,  내 마음 가운데 일어나는 탐(貪) ? 진(瞋) ? 치(痴)가 가장 무서운 것이니라.

47.허공(虛空)이 뼈가 있는 소식을 알겠느냐?

  : 허공이 없으면 당신이 없습니다.

 


48.생각이 있을 때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나타나고,  생각이 없어지면 그 바탕은 곧 무(無)로 돌아가나니라.

 


49.백초(百草)가 곧 불모(佛母)니라.      ※백초(百草): 중생의 번뇌망상, 무명초(無明草)

 

50.허수아비가 사람에 지나는 영물(靈物)임을 알아야 하나니라.

  : 죽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우리의 육체와 허수아비가 무엇이 다릅니까?

    태산이 눈을 떠 오고, 나무 닭이 웁니다.

 

 

***성불하소서()()()***